[게임 기획자 이야기] 2장 둘. 기획서는 대체 어떻게 쓰라는거죠
- 나의 이야기/기획일기
- 2019. 5. 11. 09:39
처음엔 깔끔하고 정돈된 기획서를 써야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.
아니, 깔끔한 기획서를 쓰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.
쪽대본같은 기획서를 써야하는 시간들에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았습니다.
심지어 게임을 다 만들고 난 후엔 문서화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시간도 없었어요.
다음 게임을 만들고, 만든 게임을 운영하는데에도 시간이 빠듯하니까요.
그래서 문서화에 대한 부채의식이 항상 강했습니다.
큰 스튜디오로 이직하면서 제일 기대했던 부분도 이거였어요.
'문서화를 얼마나 잘할까, 드디어 제대로된 문서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겠구나.' 라는 거요.
하지만 웬 걸, 큰 스튜디오에서도 정해진 기획서 양식은 따로 없었어요
PPT의 템플릿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, PPT로 쓸 지 워드로 쓸 지도 결정되어 있지 않았어요.
'게임 회사는 원래 이런건가?'라는 생각도 그 때엔 했었죠.
하지만 오히려 더 다행이라고 생각해서, 기획서의 통일된 포맷을 갖춰보려고 노력했어요.
좋은 기획서를 만들어보려고도 노력했구요.
이번 글은 기획서를 작성하고 다루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하려 합니다.
1. 깔끔하고 정돈된 템플릿과 양식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.
기획서 규격화와 단일화를 꿈꿨지만 가장 큰 벽은 사실 높은 전달력이었어요.
디자이너 팀과 소통할 때 사용할 기획서는 거의 PPT입니다.
디자인 요소를 설명할 때에도 편하고,
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쭈욱 나열할 때가 많으니 워드보단 훨씬 편하게 작성이 가능하죠.
하지만 프로그래머팀과 소통할 땐 워드가 더 나았어요.
PPT로 작성하니 글씨가 너무 빽빽해지거나, 여백이 너무 많아져서요.
흐름을 제대로 전달하기엔 워드가 가장 나았던 것 같아요.
기획자간에 돌려볼 밸런스 기획서는 엑셀로 만들었어요.
세세하게 작성된 조건문서보다 잘 정돈된 수식한 줄이 훨씬 빨리 이해되니까요.
공통된 템플릿으로 쓰면 모든 문서를 펼쳐봤을 때 예쁠 순 있겠죠.
하지만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.
2. 문서가 수정되는 속도는 일이 진행되는 속도보다 더디다.
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속도와 자세한 내용들이 조정되는 속도를
문서가 수정되는 속도는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.
나중엔 거의 테스트하고 바꾸고, 회의하고 바꿨던 내용들의 히스토리 문서처럼 되기도 했었어요.
그래서 점점 더 수정이 간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기획서를 작성하게 되었어요.
만약 레퍼런스와 자세한 추가 내용이 있다면 부록처럼 남기게 되었습니다.
3. 짧게 나눈 기획 회의, 잘 만든 열 기획서 안부럽다.
문장을 아무리 잘 써도,
그걸 담당할 디자이너나 개발자 혹은 다른 기획자까지도 정말 다양하게 해석을 합니다.
그러니 기획서를 썼다면 짧게라도 회의를 진행하는 게 좋아요.
일이 정말 바빠지면, 그리고 간단하다고 생각되는 항목은 기획 전달 회의를 빼먹게 되는데요.
정말 가능하면 그 기획에 관련된 사람들과 전달 회의를 가지세요.
4. 그럼에도 완성형 기획서에 대한 꿈은 버리지 말자.
앞서 계속 정해진 양식보단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기획서를 쓰도록 방향을 바꿨고,
수정과 읽기가 간편하도록 기획서를 써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.
하지만 모든 내용을 담은 완성형 기획서를 남기는 건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.
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한 기능에 대해서 기획서가 서너개가 작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요.
이걸 전부 한 곳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문서가 있다는 건 프로젝트의 중요한 유산이 됩니다.
기획자 자신에게도 기억의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줄 거구요.
물론 이 완성형 기획서를 작성할 시간이 잘 주어지진 않아요.
업데이트니, 고쳐야할 버그니 앞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은 항상 존재하니까요.
그래도 완성형 기획서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고 있다가,
시간이 날 땐 꼭 작성해두면 좋겠습니다.
제가 기획일을 처음할 때 생각했던 기획서라는 건 사실 자세하고 두꺼운 법전이었어요.
하지만 일을 하다보니 급박한 상황에 빠진 배에서 선원들끼리 돌려보는 긴급한 행동지침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.
그래서 기획서에 담는 건 기획 의도와 하면 안 되는 일, 피해야하는 일을 우선으로 적었어요.
그 다음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팀원들과 어떻게 노력했는지,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담게 되었구요.
결국엔 기획서도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이라 읽는 사람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지를 가장 많이 고민했구요.
게임 회사를 벗어난 지금도 기획서의 양식,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선 다시 고민하고 있어요.
팀마다 사용하는 양식이 다르다보니
어쩌면 기획자는 평생 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.
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.
그러니 결국엔 의도와 결정 방향, 결정 이유에 대한 내역만 잘 살려 놓았다면
그 다음은 우리 팀원들이 가장 읽기 편한 포맷으로 써둔게 좋은 기획서 아닐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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