일기 -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.
- 나의 이야기/일기
- 2020. 6. 3. 18:07
할머니 댁은 여수였습니다.
저희 집은 부산이었구요.
명절엔 꼭 할머니 댁에 갔는데, 정말 먼 길이었어요.
언젠가는 고속버스만 꼭 12시간을 탔던 기억이 납니다.
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는 시간을 더하면 정말 꼬박 하루를 길에 썼어요.
그래도 할머니 댁에 가는 건 즐거웠습니다.
오랜만에 만나는 식구들, 특히 또래의 사촌 형제들.
시내로 나가서 맛있는 걸 사주는 고모.
명절을 보내기위해 만들어진 맛있는 음식들.
그리고 집 가까이에 있던 오락실.
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바다.
4층 옥상.
오며 가며 거리는 말도 못하게 멀고,
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, 많은 식구들이 자기엔 좁았지만
할머니 댁은 참 즐거웠어요.
할머니랑 단 둘이 함께한 추억이 있는 건 아닙니다.
가끔 내려가 얼굴을 뵙고,
가끔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었지만,
할머니와 단 둘만의 추억을 만들진 못했어요.
나이가 들면 들 수록 더 그랬죠.
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,
생각보다 더 담담했습니다.
호상이다 생각했습니다.
할머니 연세 90세.
최근 1년 크게 편찮으셨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건강하셨고,
마지막 순간에도 큰 딸과 둘째 며느리가 임종을 지키며,
아주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.
아들 셋, 딸 셋도 다 잘 키우시고,
생전에 엄청 아꼈던 장손이 살아계실 적 증손주도 직접 안겨드렸었죠.
당신의 딸, 아들뿐만 아니라 손주도 열 한명이 할머니의 빈소를 지켰습니다.
조문객들도 서로 호상이라고 합니다.
코로나 때문에 장례를 못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도 잘 지나가고,
금, 토, 일이라 주말에 잠깐 시간 내서 들리기도 쉬웠고,
너무 북적대지도, 그렇다고 너무 쓸쓸하지도 않으니
조문객들도 서로 호상이라고 합니다.
하지만 이제 더 이상 여수에 내려갈 이유가 없고,
할머니를 핑계로 식구들이 만날 기회가 없어졌고,
우리 똘이도 아직 보여드리지 못했고,
밥 한 번 제대로 사드리지 못했는데,
어떻게 호상일 수 있겠어요.
입관하기 전 곱게 화장한 얼굴로 누워계신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.
화장하실 때 제 결혼식에서 입으셨던 한복을 같이 넣어달라하셨단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.
그렇게 손주가 많았어도 한 번도 제 이름을 헷갈리지 않으셨던 사랑이 기억나 눈물이 났습니다.
할머니.
전 정말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어요.
그걸 몰랐었네요.
2019. 05. 29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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