일기 - 이름을 지었습니다.
- 나의 이야기/일기
- 2020. 4. 29. 18:40
언젠가 네 할머니,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름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단다.
스스로 이름을 지어 그걸로 내 이름 삼겠노라고.
그것이 그닥 좋지 못했던 아빠의 부모자식 관계에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라고 여겼고,
그때가 되어야지만 진정으로 독립하는 것으로 생각했어.
지금의 이름에 크게 불만이 없고, 꽤 오래 이 이름으로 살았단다.
아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소중한 사람들도 잔뜩 늘었지
하지만 왠지 아빠에게 내 이름이란 먼 훗날엔 꼭 바꿀 약속이 되어있는 그런 것이었어.
그러다 네가 우리에게 왔어.
네 엄마의 웃는 얼굴을 꽤 닮은 너무 예쁜 아들이지.
웬일로 네 할머니께서 당신 손주의 이름을 직접 짓고 싶다고 하셨어.
그러고선 오래전부터 알아놓은 철학관에서 네 생년월일시를 받아 이름을 받아오셨단다.
우리가 생각해놓았던 이름이 있었지만, 너무나 완강하셔서 말릴 수가 없었어.
그저 후보만 여러 개 달라고 말씀드렸고,
너무나 다행히도 그중에 우리 마음에도 쏙 드는 이름이 있었단다.
네 할머니, 할아버지도.
외할머니, 외할아버지도.
모든 식구들이 그 이름을 좋아하고, 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단다.
네 이름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.
네 이름을 소리 내 부르면 기분이 좋아져.
똘이라는 태명이 있었지만, 이름이 생기고 나서야 정말 내게도 아이가 생겼단 실감이 난다.
이름이 생기니, 법적으로도 진짜 내 아이가 되었고.
넌 벌써 태어난 거고 이름이 뒤에 지어졌지만,
이름이 지어지고 그 이름을 불러보니 정말 찰떡같은 내 아이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어.
이름이 지어진 그 날에 네 할머니는 바로 절에 가셔서 연등에 네 이름을 올렸단다.
좋은 이름이라고 수십번 되뇐다고 하셔.
사진으로 보면서 이름을 부르면 더 기분 좋고,
영상 통화를 하면서 부르면 더 기분 좋다고 하셔.
얼른 곧 직접 보고 이름을 불러주면 얼마나 기쁠지 생각한다고 하시는구나.
이렇게 설레하시는 모습, 이렇게 기분 좋아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.
아빠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, 첫 월급을 드렸을 때도,
네 엄마와 결혼할 때에도 이렇게 좋아하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.
서로가 말을 칼 삼아 날카롭게 찌를 때에도 이렇게 감정적이진 않았던 것 같았고.
너의 이름을 소리 내 읽으시면서 기분이 좋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,
아빠의 이름을 지을 때도 저렇게 설레고 좋으셨겠느냔 생각이 들어.
아빠의 이름도 저렇게 소중히 여기셨겠느냔 생각이 들어.
아빠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기분 좋고 가슴 뛰듯,
네 할머니가 아빠의 이름을 처음 부를 때 그랬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구나.
무엇을 용서하고, 무엇을 용서받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하고
이젠 잊고 지내면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 버렸지만
아직 가슴속에 신발 속 모래처럼 남아있는 앙금들이 있었단다.
하지만 네 이름을 저렇게 아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,
조금은 털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.
갓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지만,
이런 생각이 들 땐, 아빠에게 어떻게 너란 행운이 왔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란다.
아들, 너무 사랑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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