잡담 - 구두약 냄새
- 나의 이야기
- 2019. 3. 28. 07:55
출근하려고 버스에서 내려 잠깐 걸어가는 길이었다.
어디서 나는지 모를 구두약 냄새가 확 올라왔다.
구두약 냄새를 맡고 나도 모르게 어렸을 적 생각이 떠올랐다.
조금 당황스러웠다. 당연히 구두약 냄새가 불러일으킬 향수는 군대 시절일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어릴 때가 떠올라서.
지금에야 예비군마저 끝나고 손질도 하지 않아 군화가 엉망이 되었다.
하지만 군대 안에 있을 때엔 군화 손질이 참 즐거웠다.
훈련병일 땐, 그 인구밀도 높은 곳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이었다.
자대 안에선 하루를 마치는 일상의 시간에 베인 냄새였고, 첫 휴가 나가는 나를 챙기는 선임과 함께 혹은 첫 휴가 나가는 후임과 함께 맡은 냄새였다.
그래서 구두약 냄새를 맡으면 바로 군대에 있을 때가 떠오를 줄 알았다.
그런데 갑자기 맡은 구두약 냄새가 떠올린 생각은 한 번도 닦아 보지 못한 아버지 구두였다.
어렸을 적 설거지는 백 원, 집안 쓸고 닦기는 이백 원 씩 용돈을 받던 적에 아버지 구두닦기는 목록에 없었다.
당신께서 일로 집에 잘 못들어 오시기도 했거니와 구두를 신으실 일도 없어서 아버지 구두는 집에 몇 켤레 없었다.
있더라도 깔끔하신 어머니가 이미 손질을 다 해두어 '아버지 구두를 닦는다.'라는 건 할 수 없는 집안일이었다.
있었다면 아마 백 원은 받을 수 있었을 텐데.
어쩜 아버지 구두 한 번 닦아본 추억도 없이, 그리고 아들이 구두 한 번 닦아준 추억도 없이.
이렇게 추억이 빈약한 부자관계가 너무나 슬퍼서, 어디서 났는 지도 모를 구두약 냄새에 왈칵 울어버릴 뻔 했다.
'나의 이야기' 카테고리의 다른 글
일기 - 똘이의 태아보험 구성. 어떤 걸 넣고, 어떤 걸 뺐는지. (2) | 2019.12.02 |
---|---|
강식당 2 단상 - 팀 플레이에 대해서 (0) | 2019.06.30 |
잡담 - 데이비드 호크니 서울 시립 미술관 전시를 다녀와서 (알고가면 좋았을 내용들, 알아뒀더니 좋았던 것들을 정리하며) (0) | 2019.05.02 |
잡담 - 영화를 본다는 것 (0) | 2019.04.29 |